자기주도진로

[Vol.38] “관심 분야가 무한대? 미래는 다능인의 시대입니다”


美대학서 계리학 전공→놀이커뮤니티 기획자 오은비 씨

 

‘다능인(多能人, multipotentialite)’. 에밀리 와프닉의 저서《모든 것이 되는 법》에서 소개한 다능인의 정의는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결합하고 연결해 혁신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일컫는다.

10여 곳의 직장을 거치며 여러 가지 일을 해온 오은비(36) 씨는 자신을 ‘다능인’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했다. 한우물을 파서 ‘장인(匠人, artisan)’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했던 그는 한때 자신이 ‘경험중독자’가 아닌지 위축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 혁신은 교차점에서 일어나는 법이라 했던가. 그는 “미래는 다능인의 시대”라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 취업 가시밭길…‘사이드프로젝트’로 길 찾다

광주에서 여중, 여고를 졸업한 은비 씨는 수시전형으로 일찌감치 전남대학교에 합격했다. 수능시험을 치른 후 은비 씨는 아르바이트 대신 어머니의 권유로 토플 공부를 시작했다. 그에게 토플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상고 출신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광주에서 자랐지만 대학을 서울로 가겠다는 생각조차 안 했었는데 그 선생님과 영어공부를 하면서 다른 나라의 문화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미국 유학까지 결심하게 됐죠.”

2002년 4월부터 *브리검영대학(Brigham Young University, 이하 BYU) 하와이캠퍼스에서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BYU에서 제일 각광받는 회계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은비 씨에게 회계학은 그다지 재미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회계학이 아닌 다른 전공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평소 관심 분야였던 가족상담이나 인간 발달과정 및 심리와 관련된 분야로 전공으로 바꿔볼까 해서 휴먼 디밸럽먼트 앤 패밀리 스터디(Human Development and Family Studies)과정을 2학기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회계학과 관련 있는 계리학(Actuaries science, 보험통계학/빅 데이터 분석)을 전공으로, 테솔(TESOL)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미국에서 계리학 전공자는 단계별 시험을 통과하면 *계리사(Actuaries)로 활동할 수 있다. 계리사는 요즘 각광 받는 빅 데이터(Big Data)를 분석하는 직업으로 미국에서는 의사보다 연봉이 높은 전문직으로 통한다.

은비 씨의 공식적인 첫 직장은 국내 화재보험 대기업 내 컨설팅업무를 담당하는 외국계컨설팅회사이다. 하지만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 얼마 되지 않아 퇴사했다. 이후 여러 곳의 대기업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실패했고 오랜 유학생활로 떨어져있던 부모님과 함께 지내기 위해 고향인 광주에서 직장을 구했다.

광주에서는 광산업단지 내 LED제조회사에서 신소재(LED 신호등 및 조명) 기술영업 및 해외 수출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과학기술 국제협력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특허정보원(KIPI), 한국해양과학기술진흥원(KIMST) 등 과학기술 분야 공공기관에서 국제협력직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은비 씨가 ‘다능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은 *브라질 ‘국경 없는 과학(Ciencia sem Fronteiras)’사업의 프로젝트매니저(PM)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교육부 산하기관인 한국사학진흥재단(KFPP) 소속으로 2014년 3월부터 3년 반 동안 일했다.

그가 브라질 ‘국경 없는 과학’프로젝트를 담당할 때 했던 일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결합하고 연결해 혁신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과학기술에 특화된 국내 대학과 컨소시엄을 맺어 브라질 엘리트 대학생들을 한국의 대학 내에 배치하고 그들이 한국 기업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선진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브라질대사관에서 일할 때 은비 씨는 “직장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개인적인 관심 분야에 투자할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 즈음 대상의 필요나 문제를 발견하고 공감해서 바꿔나가는 *디자인씽킹(Design Thinking: 디자인적 사고)에 흥미를 느낀 은비 씨는 관련 동아리를 찾아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디자인씽킹을 활용해 경력단절여성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워크숍을 열기도 했고, 자신의 주 업무인 브라질 ‘국경 없는 과학’에 디자인씽킹 기법을 적용해보기도 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엘리트인 브라질 학생들이 한국 대학생활 적응에 실패해 우울증을 호소하거나 상담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디자인적 사고를 통해서 이들이 국내 기업에 인턴십으로 가기 전에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자기 진로를 어떻게 설정할지 등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적용해보기도 했죠.”

 

■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할 수 있는’ 놀이판 만들겠다

브라질 학생들을 보며 은비 씨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만을 좇아 살았지 왜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은비 씨는 당시 한 장의 사진(영국의 팝업 파크(Popup Park)라는 단체가 한 아파트촌 공터에서 벌인 팝업놀이터 사진)을 보고 ‘놀이(Play)’에서 답을 찾게 됐다고 말한다.

도전하고 실패해볼 틈도 없이 쉬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삶, 숨을 쉬기 위해서는 ‘놀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에게는 왜 일 외에 놀이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르렀다. 다음 세대가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성인이 됐을 때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을 익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판을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제 문제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학교든, 직장이든 어느 곳에서도 놀이를 통한 여유를 가져볼 기회가 드물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일과 취미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든 시대가 열렸어요. 일 외에 자기 취향을 만들 수 있는 놀이판이 필요합니다. 내 취향이 여러 개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런 취향들이 직업이 될 수도 있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돈을 버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오랜 조사기간을 거쳐 2015년 4월 은비 씨는 사이드프로젝트로 ‘팝업 플레이 서울(Popup Play Seoul)’을 시작했다. ‘팝업 플레이 서울’은 즐거움, 자유로움, 도전, 융통성, 자기주도성을 놀이의 철학으로 생각하며,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통해 놀이의 본질과 가치를 커뮤니티 안에서 실행하고자 했다. 그 후 사회적경제 아이디어대회인 ‘위키서울’에 선정돼 활동비 지원을 받아 서울 2개 지역(불광동 서울혁신파크, 성수동 디웰)에서 6개월 동안 팝업 놀이터를 운영할 수 있었다.

2016년 8월 브라질의 ‘국경 없는 과학’ 사업이 중단되면서 은비 씨는 아예 퇴사를 감행한다. ‘팝업 플레이 서울’은 유니세프, 서울특별시교육청 등과 함께 하면서 ‘2016 서울어린이대공원 놀이엑스포’라는 대형 프로젝트까지 맡게 된다. 회사라는 조직을 나오면서 오히려 사회혁신, 창업생태계, 소셜 벤처 등 다양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국내 자동차 회사의 씨드 스쿨(Seeds School), SK나비아트센터 등에서 혁신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를 담당하기도 했고 올해 서울에 이어 안산시에서 열린 팝업 놀이터에서는 커뮤니티 기획자 양성과정을 진행하는 등 ‘팝업 플레이 서울’에 집중했다.

“팝업 플레이 서울의 모토는 어린이들이 삶을 살아가는 기술(라이프 스킬, life skill)을 배우도록 돕는 것입니다. 각자 원하는 대로 목공도 하고, 톱질 칼질도 하고, 종이상자로 놀이도 하면서 말이죠. 어른들에게는 플레이메이커(playmaker, 놀이 커뮤니티 기획자)라는 신직업을 소개하고 그들이 각자의 동네 공터에서 활동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서울산업진흥원(SBA)이 미래형 신직업으로도 소개한 ‘놀이 커뮤니티 기획자(Playmaker)’는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이와 더불어 마을의 놀이 문화와 문제를 발견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어린이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놀이판을 기획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살아가고 싶다는 은비 씨는 현재 자신을 실험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꿈이 있다면 초등학생들이 일주일에 2~3번이라도 충분한 놀이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플레이메이커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먼 미래엔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와서 호기심을 펼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공간, 즉 영국의 *상상력연구소(Institute of Imagination, ioi)와 같은 연구소를 설립하고 싶다는 꿈도 있다.

 

*브리검영 유니버시티(Brigham Young University) :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1955년에 하와이에 설립한 사립대학교이다. 캠퍼스는 하와이와 프로보, 그리고 아이다호, 세 곳에 위치한다. 약칭 BYU.

*계리사(Actuaries): 미국계리사는 현직에서 일하면서도 계속 시험을 봐야 한다. 레벨에 따라 회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한다.

*브라질 ‘국경 없는 과학’ 프로젝트: 2011년 취임한 지우마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국가장학사업. 브라질의 낙후한 과학기술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각국에 우수한 이공계 대학생을 선발해 국비로 1년간씩 유학을 보내는 프로그램이다. 1기 2012년부터 2014년까지 10만 명을, 2기 2015년부터 2018년까지 10만 명을 해외로 보낸다는 계획이었지만 지우마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중단됐다.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를 바꿔 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디자인 씽킹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전반적인 비즈니스의 문제 해결 과정에 도입하는 것을 일컫는다. 디자이너의 문제 해결 방식은 스탠포드대학교의 디 스쿨(D-School)에 따르면 공감하고, 문제를 정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시제품을 제작하고, 사용자 테스트를 진행하는 단계를 거친다.

*상상력연구소(Institute of Imagination, ioi): 영국의 어린이박물관을 상상력 중심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으로 예술과 교육, 과학과 디지털기술이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개발하고 ‘상상력 랩(Imagination Lab)’으로 운영하고 구현해 왔다. 상상력연구소의 경험과 학습(Experience and Learning) 디렉터이자, 학습 경험의 콘셉트 디자이너인 톰 도스트(Tom Doust)는 는 영국의 ‘팝업 파크(Pop up Parks)’의 설립자이며, 예술과 기술을 접목한 교육프로그램 개발·관리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교육, 문화, 디자인 분야에서의 공공의 참여 프로그램을 위해 15년간 활동해 왔다.

[글쓴이] 김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