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줌인

[Vol.36] 배움을 스스로 설계하는 PBL수업, 교과서 상식을 뒤집다


프로젝트중심수업으로 달라진 교실

 

조선 후기 성군으로 추앙받는 정조대왕은 수원 화성 축조를 결심하고 그 설계를 실학의 거두 정약용에게 맡겼습니다. 정약용은 서양의 과학기술책을 참고해 거중기를 발명하는 등 수원 화성 축조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거중기는 여러 개의 도르래를 이용해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덕분에 10년을 예상한 공사가 2년 9개월 만에 끝날 수 있었지요.

여기까지가 역사 시간에 배운 수원 화성의 대략적인 축조 과정입니다. 하지만 21세기 서울의 모 고교 학생들이 이런 역사 교과서의 지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발칙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거중기 때문에 공사기간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면서 말이죠. 이 학생들은 두 학기에 걸쳐 주 4시간의 정규 수업과 동아리 활동을 통해 수원 화성과 거중기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수업을 했기에 고정불변의 상징인 교과서의 상식을 뒤집을 수 있었을까요?

그 힘은 프로젝트 중심 수업(Project Based Learning, PBL)에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융합 프로젝트 교육 모형(수레바퀴 모형)에 따라 과학, 기술, 공학, 예술, 수학, 역사학, 지리학, 서지학 등 8개의 팀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과학팀은 거중기의 구조를 분석했고, 기술팀은 CAD를 활용해 고문헌 속 건설 장비들을 재구성했습니다. 공학팀은 성벽과 방어 시설의 구조를 분석했고, 예술팀은 거중기 등 공사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수학팀은 공사 비용을 계산하는 작업을 수행했고, 역사팀은 조선 후기 사회문화를 조사했습니다. 지리팀은 화성의 지형을 분석해 모형을 만들었고, 서지학팀은 화성 건설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의 번역본을 분석했습니다.

학생들은 팀별 연구 성과를 서로 발표하고 토론하면서 공유했습니다. 이렇게 집단지성을 발휘한 결과 거중기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역할만을 했을 뿐, 현대의 크레인처럼 상하, 전후, 좌우 운반하는 기능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게다가 거중기는 공사 기간 내내 단 한 대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건설의 대부분은 인력에 의존했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이런 여러 연구결과를 종합한 후 수원 화성의 공사기간 단축은 거중기보다 성과급제에 의한 효율적인 인적 자원 관리에 기인했다는 추론에 도달했습니다. 학생들의 융합 연구 결과는 논문, 다큐멘터리, 뉴스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PBL 수업은 대학생들도 해내기 어려운 성과를 고등학생들이 도출해낼 수 있게 해줬습니다. 수업의 혁신이 놀라운 성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실제로 입증된 것이죠. PBL 수업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뉴텍하이스쿨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95년부터 PBL 수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이 프로젝트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모든 프로젝트 수업은 두 개 이상의 교과목이 융합된 형태로 구성됩니다.

예를 들어 생물 교과와 체육 교과가 융합된 바이오 피트니스(Bio Fitness) 수업(60차시)에서는 ‘세계 천연자원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50여 명 학생들은 저마다 노트북을 책상 위에 놓고 과학, 체육 두 명의 교사들과 세계 천연자원의 현황과 문제, 대안 등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북아메리카 팀, 아프리카 팀, 중동 팀 등으로 나뉘어 우선 천연자원 현황, 숲과 경작지 현황, 공기의 청정도와 수질 등 기초조사를 진행하죠. 다음으로 현재의 자원이 미래에는 어떻게 변할지 조사를 합니다. 그리고 자원의 변화가 기후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서로 발표하고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기본적으로 생물과 체육 관련 내용을 많이 공부하지만, 자원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 환경문제나 인권문제도 함께 다룹니다.

공부한 지식은 습득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체육대회를 열어 자금을 모으고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형태로 말이죠. 환경문제와 인권문제가 자원부족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국제기구 기부를 통해 문제해결에도 나서겠다는 취지입니다. 배운 것을 공유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팟캐스트 제작도 수업 내용에 포함돼 있습니다. 아무래도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려면 고급 정보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경우도 꽤 있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섭외하고 연락하고 소통하는 일도 교사와 학생들의 몫입니다. 이렇게 전문가가 학교에 초빙돼 수업에 참여하게 되면 수업은 직업탐구, 진로탐색 모드로 변환됩니다.

프로젝트 수업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배움을 스스로 설계하면서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 다양한 관심사로 배움이 확장된다는 점일 겁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점수를 위해 공부하지 않고, 쓸모가 많은 지식과 경험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팀별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때문에 나 혼자 잘해서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역량의 핵심 요소인 지식-실천-인성-메타러닝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수업 형태로 볼 수 있겠습니다. 뉴텍고등학교의 수업 혁신 사례는 미국 전역으로 뻗어나가 현재 180여 개 학교에서 PBL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가 많긴 하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각각 23개, 41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학교들은 뉴텍 네트워크라고 불립니다.

 

우리나라에도 뉴텍 네트워크와 비슷한 네트워크가 있죠. 미래교실네트워크입니다. KBS의 정찬필 PD가 2014년 ‘거꾸로교실(플립러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성과가 확인된 뒤 ‘거꾸로교실 교사모임’이 전국 단위로 생겨난 것이죠. ‘죽은 아이를 살려냈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거꾸로교실도 수업의 주도권을 학생들이 갖는다는 점에서 PBL의 기초 형태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는 이런 수업의 형태를 ‘Blended Learning’으로 분류하고 있기도 합니다. 미래교실네트워크 소속의 선생님들은 저마다의 수업혁신 사례를 모으고 공유해서 현재는 1000개가 넘는 사례가 쌓였다고 합니다. 참여 교사 수도 1만 명을 훌쩍 넘었고요.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수준에서 PBL 수업을 할 수 있는 훌륭한 토대입니다. 수업이 토론, 실험·실습, 프로젝트 학습, 체험 학습 등으로 이뤄지니까요. 학생들은 진로탐색활동, 주제선택활동, 예술·체육활동,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재미있는 수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진행된 자유학기제의 다양한 수업혁신 사례들은 성과발표회 등을 통해 차곡차곡 쌓여 학교들끼리 공유되고 있습니다. 수업의 변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됐습니다. 소중하게 잘 가꾸고 발전시킬 일만 남았네요.

※이 글은 △자유학기제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수업모형 연구(한국교육개발원·인천대학교, 김평원, 2016) △21세기 교육패러다임-세계의 PBL 6부(EBS 방송프로그램, 2016) △미래인재 양성을 위한 핵심역량 교육 및 혁신적 학습생태계 구축(Ⅱ)(한국교육개발원, 최상덕, 2014) 등을 참고하여 쓰였습니다.

[글쓴이] 최중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