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명저

[Vol.35] “우리가 세계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백범일지(김구 著, 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년)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71년 전, 1947년 백범 김구는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뜻은 변함이 없을 듯합니다. 《백범일지》는 김구의 삶과 사상은 물론, 귀중한 역사 기록물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백범은 《백범일지》 상권을 다 쓰고 나서 열 살, 일곱 살이 된 두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19쪽

《백범일지》는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백범도 진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17살 임진년 경과(慶科)에 응시해 낙방하고 관상 공부를 하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하죠. 18살에는 동학에 입도합니다만,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61쪽

20살에 만난 유학자 고능선은 이렇게 백범을 위로합니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 상심 말게.” -62쪽

훗날 백범은 20살 시절의 스승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 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180쪽

백범은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1895년 5월에 청국 기행을 떠나 만주까지 갑니다. 11월 돌아오는 길에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전투에 참가했다가 패전을 겪지요.

21살 청년 백범은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이고 황해도 해주 감옥에 투옥됐다가 인천 감옥으로 이송됩니다. 옥중에서 장티푸스에 걸리기도 하고 자살을 기도하지만 주위 사람들에 의해 살아나지요. 세 차례 심문 끝에 교수형을 받지만, 고종은 판결을 보류합니다. 백범은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하면서 대학(大學), 세계역사, 세계지지, 태서신사 등 서양 근대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이 시절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것이 지난해 개봉한 《대장 김창수》입니다. 사형수 김창수가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로 거듭나게 된 청년 시절을 그린 것이죠.

백범은 23살 되던 해 인천 감옥을 탈옥해 삼남으로 도피하고 늦가을에 충남 마곡사에서 중이 되기도 합니다. 탈옥 후 도피 중에 김구(龜)로 개명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신교육 운동에 전념합니다. 30대 초반에는 항일 비밀 결사인 ‘신민회’ 활동을 하고, ‘105인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받죠. 30대 후반 서대문감옥 수감 중에는 이름을 김구(龜)에서 김구(九)로, 호를 백범(白凡)으로 바꿉니다.

이름과 호를 바꾼 것은 결심의 표시였습니다. “龜를 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267쪽

백범은 1919년(44살)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합니다. 그 후 27년 동안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1940년(65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합니다. 1945년(70살) 해방 후 환국하여 민족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1949년(74살)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1947년 백범이 쓴 ‘나의 소원’에는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백범의 미래 비전입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 426쪽

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정부는 백범이 잠든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성역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입니다.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는 주말에도 역사여행과 가족교육 등이 열립니다. 가족나들이 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글쓴이] 김봉억 에디터